STRANGE CITY

[월엘] 터널 (180127)

2018. 8. 7. 00:43 | 소설/데스노트




 그 날은 산책하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눈이 가득 쌓인 풍경에, 차가 다니지 않는 길가, 비어 있는 일정을 가지고서 내가 외출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쌀쌀한 날씨에 밖을 나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굳이 옷을 두텁게 입고 나간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가능성이 없다는 스스로의 추측을 깨버린 꼴이었다. 어쩌면 일이 없기 때문에 괜히 걸으러 나온 걸지도 모르겠다. 이럴 바엔 공부를 하는 것이 나았겠지만, 오늘은 공부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날이었다.


 건물 하나 없고, 멀리 보이는 차도 없는 한적한 길에는 이미 먼저 온 이가 있었다. 옆에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그만 보면 될 것을. 계속 저러니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녔다. 이렇게 추운데도 흰 티셔츠와 청바지만 입은 채 서 있다니, 괴상하지 않은가. 추위를 안 타는 걸까. 입김따위도 전혀 나오지 않는 저 모습을 보라. 피부는 하얗지만 안색이 더 나빠진 것은 아니었으며 몸을 떨지도 않았다. 목도리와 장갑까지 하고 있는 자신과, 그렇지 않은 이를 함께 두니 이토록 대비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이상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녀석은 태연했다.


  내 입에선 입김이 가득 나온다. 나만 더 추워진다. 이렇게 추운 줄은 몰랐는데, 기온 정도는 확인하고 올걸 그랬다. 이런 날씨에 버스를 기다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춥더라도 아직은 들어가기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릴없이, 정류장과 떨어진 거리에 있는 터널을 바라보았다. 긴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색만 머금고 있다. 그다지 낯선 모습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이의 머리카락도 같은 색일 정도로 흔히 볼 수 있는 색이니까. 단지 버스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어서 초조한 마음이 되었다. 나답지 않게 여유를 잃고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보이십니까?


 여태 한마디 하지 않던 녀석이 검지 손가락으로 터널의 어둠을 가리켰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나는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를 놀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울컥했다. 뭘 말하는 거야. 누가 봐도 어둡잖아. 이전에도 나를 골치아프게 만들었으나, 지금만큼 유난히 짜증이 나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짓이긴 답을 내뱉는 것은 금방이었다.


  당연히 안 보이지.


  그는 당장 손가락을 내리지도, 고개를 내게로 향하지도 않았다. 마네킹처럼 굳어 있다가, 1분은 지나지 않았나 싶은 때에 손을 내렸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할 수가 없다. 한참이 지난 뒤에도 대답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을 끄는 수밖에 없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까와 비교하여 30초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보단 더 지났을 줄 알았던 추측이 바로 빗나갔다. 아니면 내가 아까 시계를 잘못 본 건가? 분명히 30초보단 긴 시간이 지났는데, 내가 아까 시계를 잘못 봤나? 다리의 떨림이 도저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버스는 오지 않을 겁니다.


 적막을 깨는 소리에, 다리를 보던 시선을 들었다. 아래를 볼 때까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거리였으나, 녀석은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당황한 내 몸은 뒤로 넘어졌고, 목도리가 흐트러졌다. 그가 평소보다 크게 뜨여진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노려보는 것이라기엔 무심했고, 이유가 없다기엔 강렬한 눈빛이었다. 평정심을 찾지 못한 내 몸이 빠르게 숨을 내쉰다. 무너져내린 나를 남겨두고, 그는 말없이 터널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터널 안으로 네 형상이 파고든다.


  한숨을 내쉬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자, 찬 바람이 옷 사이로 샌다. 빈 길가에는 누군가의 발걸음이나 경적조차 들리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버스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네가 사라진 터널에도 가지 못하는 나의 발이 이곳에 묶여 있을 뿐. 터널 너머엔 무엇이 있는가. 절대 알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을 뒤로 하며, 망가졌던 옷차림을 단정하게 한다. 언뜻 보인 시계의 초침이 아까보다 10초가 지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라이토는 엘의 터널 끝을 볼 수 없었다. 엘은 라이토의 정체를 알고 죽었으나 라이토는 엘의 이름과 과거를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걸 알게 될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비밀을 터널 그리고 기회를 버스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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