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NGE CITY

[월엘] 사랑하는 신기루

2020. 2. 22. 22:22 | 소설/데스노트

거친 물방울이 쉴틈없이 세상을 두드렸다. 한가을의 단풍나무가 고개를 숙여도 장대비는 물러서지 않고 더욱더 억세져만 갔다. 소나기가 내릴 거라던 기상캐스터의 말과는 달랐다. 우산을 챙기지 않았던 사람들이 빗속을 헤치며 집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침에 아버지와 사유가 우산을 챙기고 나가서 다행이였다. 이토록 흐리고 축축한 날씨에는 나가고 싶지 않았기에, 평소처럼 책을 펼쳤다.

너는 침대와 닿을 듯 말 듯한 높이에서 평소처럼 웅크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계속 날 보고 있는 거야?”라고 물으면 늘 실없는 대답만 돌아온다. 그런데도 종종, 너의 시선이 깊이 찔려올 때면 무엇이든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또다른 나를 아는 너는 과연 지금의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너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걸 파헤치고 싶지만, 너무나도 고요하고 담담한 네 눈동자에 내 욕망이 이미 전부 드러난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다시 말을 삼킨다.

팔락팔락. 종이 소리만 남는다. 빗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문득 침대 위를 돌아보니 네가 없었다. 금방 돌아오겠거니 생각했으나, 몇십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가끔 사라졌다 나타나곤 했어도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운 건 처음이었다. 빗방울이 창을 두드리는 매순간 이상할 정도로 초조해졌다. 유일하고도 소중한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릴 듯한 예감이 치밀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아무도 없는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바깥 세상은 거친 비가 온 세상을 적실 듯 쏟아지고 있었다. 머지않은 곳에 서 있는 너를 보자, 미처 우산을 들고나올 생각도 못 하고 빗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저 두려웠다. 가만히 멈춰 있는 네가 마치 젖은 종이처럼 금방이라도 쇠할 것만 같았다.

“류자키! 빗속에서 뭐 하는 거야? 이러고 있으면….”

“아, 라이토군.”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네가 천천히 움직였다. 흐린 하늘만큼 창백한 얼굴이 흔들림 없이 나를 마주했다. 그 눈빛이 이상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내 이름을 담는 목소리, 어렴풋한 표정, 후줄근한 옷은 어제의 너와 다르지 않을 텐데. 이 순간만큼은 내 삶에서 따로 도려낸 듯 어제와 다르게 느껴졌다. 익숙하고도 멀었다. 어제에서 이어진 오늘의 현장을 보는 게 아니라, 오래된 사진을 꺼내 들고 과거를 회상하는 것처럼 막연하게 그리웠다. 아마도 전생의 어느 순간에 비슷한 경험을 해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때의 기억 없이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고, 모든 기억을 홀로 안고 있는 너는…….

뒤늦게 깨달았다. 흠뻑 젖어버린 나와 달리 너는 소맷자락조차 젖어 있지 않았다. 시야를 뒤덮는 빗방울 중 어느 하나도 너를 건들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너는 죽었으니까.

유령이므로, 빗속에 있다고 해서 젖을 리가 없었다.

수중에 갇힌 듯 숨이 막혀왔다. 쏟아지는 빗방울이 나만을 노리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었다. 내 얼굴을 만지려는 듯 너의 손이 다가왔다. 당연히 피부 위로 남는 촉감은 없었다. 망자의 손은 생자를 통과할 따름이었고, 이 무감각한 접촉이 나를 더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세상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을 너의 사소한 움직임이 전부 나를 흔들고 있었다. 이윽고 손을 거둔 너는 자신의 손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담담히 중얼거렸다.

“이제 라이토 군을 닦아드릴 수도 없네요.”

"……."

이대로 비가 멎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표정을 숨길 자신이 없다. 진득하게 몸에 들러붙는 셔츠,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따위는 상관없다. 모든 슬픔의 회로가 닫힐 때까지는 가만히 흘러가고 싶다. 제발, 더 많이 내려라. 내 얼굴이 젖어가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도록.

아무 말도 못하고 허공의 너를 그러안는다. 잡히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두 팔을 뻗고, 지금의 시간을 기어코 품에 둔다. 살아 있는 현실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곧 잊어버릴 꿈이기를. 그렇게 이 고통의 끝을 꿈꾸면서.